리듬을 회복하는 비아그라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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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어라유빛 작성일25-12-15 16:20 조회2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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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듬을 회복하는 비아그라의 힘
삶의 리듬이란 단지 아침에 일어나고 밤에 잠드는 일정한 주기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만의 템포로 하루를 살아가며, 자신감 있게 관계를 유지하고, 활력 있는 에너지를 발산하는 모든 일상의 중심입니다. 그러나 남성의 삶에는 예고 없이 찾아오는 변화가 있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점점 느려지는 반응, 기대만큼 따라주지 않는 몸, 그리고 말없이 침묵하게 되는 시간들. 이런 변화는 단순히 체력의 문제가 아니라, 자존감과 연결된 깊은 주제입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당신은 그 변화의 정체를 알아차리고 해결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이는 매우 현명한 첫걸음이며, 그 선택의 중심에 비아그라가 있습니다. 단순한 약으로 여길 수 있지만, 비아그라는 과학과 데이터, 수많은 사용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검증된 남성 건강 회복 솔루션입니다.
비아그라는 1998년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승인을 받은 이후, 전 세계 100개국 이상에서 사용되고 있는 대표적인 발기부전 치료제입니다. 그 주성분인 실데나필은 남성의 성기능을 돕는 기전이 매우 명확하게 입증된 성분으로, 음경 내 혈류를 증가시켜 자연스럽고 안정적인 발기를 유도합니다. 비아그라는 남성을 자극하지 않지만, 성적 자극이 있을 경우에만 작용하는 특성이 있어 인위적이지 않고 자연스러운 관계를 가능하게 합니다. 다시 말해, 비아그라는 당신의 리듬을 되찾아주는 과학적 열쇠입니다.
성기능 저하는 단순한 노화 현상이 아닙니다. 당뇨, 고혈압, 고지혈증과 같은 만성 질환이나 흡연, 음주, 스트레스 같은 생활습관도 주요한 원인으로 작용합니다. 특히 스트레스와 심리적인 요인으로 인해 젊은 남성에게도 성기능 저하가 나타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이런 변화 앞에서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는다면, 점점 더 관계의 질이 저하되고, 자존감은 무너집니다. 전문가들은 반복되는 실패 경험이 남성에게 큰 심리적 위축을 가져오며, 결과적으로 더 큰 기능 저하로 이어질 수 있다고 조언합니다.
비아그라는 이러한 악순환을 끊는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복용 후 30분에서 1시간 이내에 작용하며, 4~6시간 정도 효과가 지속됩니다. 이는 준비되지 않은 불안함보다, 계획된 자신감을 만들어주는 큰 장점입니다. 특히 자신에 대한 믿음을 회복하게 되면, 성생활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삶의 만족도까지 상승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수많은 사용 후기가 말해주듯, 비아그라는 단순히 육체적 회복을 넘어, 정신적 회복의 출발점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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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아그라의 효과는 단기간에 경험할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생활습관과 병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규칙적인 운동, 알맞은 수면, 스트레스 해소를 병행할 때 그 효과는 더욱 커집니다. 특히 유산소 운동은 혈관 기능 개선에 도움이 되며, 이와 함께 비아그라를 사용할 경우 혈류 개선 효과가 극대화됩니다. 즉, 비아그라는 단기적 해결책이 아닌, 중장기적 건강 회복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활용될 수 있는 제품입니다.
많은 남성들이 비아그라 복용을 주저하는 이유는 자연스럽지 않다는 선입견과 남자로서 부족하다는 자격지심에서 비롯됩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분명히 말합니다. 비아그라는 부족함을 감추는 도구가 아니라, 몸이 필요로 하는 균형을 회복시키는 하나의 방법일 뿐이라고. 더 이상 나이를 이유로, 피곤함을 이유로 관계를 회피하지 마십시오. 파트너와의 진실한 소통은 자신감에서 시작되고, 자신감은 준비된 몸에서 나옵니다.
비아그라를 통해 리듬을 회복한 수많은 사용자들은 단지 성생활에 만족감을 느끼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들은 삶의 질이 전반적으로 향상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예전에는 아내의 눈치를 보며 피했는데, 지금은 먼저 다가갈 수 있다, 몸도 마음도 다시 청춘이 된 느낌이다, 삶에 활력이 생기니 업무 성과도 좋아졌다는 반응들이 이어집니다. 이런 후기들은 단순한 광고 문구가 아니라, 과학적 근거와 실질적 효과가 만난 결과입니다.
현대사회는 남성의 성건강을 더 이상 감추거나 부끄러운 문제로 보지 않습니다. 유럽, 미국, 일본 등 다양한 국가에서 성기능 관리는 남성 건강관리의 중요한 축으로 인식되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정기 검진과 함께 성기능 상담을 병행하는 경우가 늘고 있습니다. 특히 40대 이후의 남성이라면 단순한 건강검진만으로는 부족하며, 성기능에 대한 점검과 대응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마지막으로, 관계란 단지 행위가 아니라 교감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깊은 신뢰를 나누기 위해서는 말보다 중요한 것이 존재합니다. 바로 몸의 리듬입니다. 그 리듬이 맞지 않을 때 생기는 불편함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불안함을 동반합니다. 하지만 그 리듬을 회복했을 때, 말 없이도 통하는 관계가 완성됩니다.
이제, 당신의 리듬을 되찾을 시간입니다. 비아그라는 과학의 이름으로, 당신의 리듬과 자신감을 되돌려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부끄러움이 아닌 자부심으로, 숨김이 아닌 선택으로. 지금 당신이 내리는 결정이, 앞으로의 당신을 바꾸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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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admin@reelnara.info
[월간 옥이네]
▲ 성악가 김진수씨
ⓒ 월간 옥이네
언젠가 충북 옥천 지역문화창작공간 '둠벙'에서 지역 중학생을 대상으로 클래식 공연이 열린 적이 있습니 사이다릴게임 다. 만화책·그림책이 빽빽한 서가 앞에서 첼로와 바이올린, 건반 선율에 손뼉을 치며 호응했던 날이지요. 그 장면이 무척 흐뭇했던 터라, 그대로 촬영해 SNS 계정에 올린 적이 있는데요. 그 직후 한 사람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저도 둠벙에서 꼭 노래하고 싶습니다. 한국에 가면 같이 공연을 기획해봐요."
릴게임사이트추천 그의 이름은 김진수. 옥천 출신으로, 현재 독일 카를스루에 극장에서 테너로 활동하고 있는 성악가입니다. 이미 수백 명의 오케스트라·합창단과 함께 큰 무대에 서는 그가 노래하고 싶다는 곳은 옥천의 작은 문화공간. 내심 반가웠지만, 공간 규모를 잘 모르는 그가 덜컥 제안한 것은 아닐까 잠시 망설였습니다. "이곳은 전문 공연장이 아니고, 공간도 크지 않 알라딘릴게임 다"는 노파심 섞인 설명에 웃음 섞인 대답이 돌아왔죠. "그래서 더 그곳에서 노래하고 싶어요."
클래식을 어렵게 만드는 건 공간의 격식이 아니라 마음의 거리라고 했던가요. 일상의 기쁨과 슬픔, 삶을 품은 음악이 사람들 곁에서 자연스럽게 피어나길 바란다는 그의 말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습니다.
지난해 여름, 그를 초청한 공 바다이야기예시 연을 둠벙에서 열어보려 했지만 여러 사정으로 무산되고 말았는데요. 올해 여름 휴가로 고향을 찾은 김진수씨를 오랜만에 다시 만났습니다. 그는 1년에 한 번 주어지는 긴 휴가를 모두 고향 방문에 쏟습니다. "옥천에서 자란 저는, 여전히 옥천을 그리워합니다."
그가 어떻게 성악가의 길을 걷게 됐는지, 그리고 왜 여전히 옥천에서 노래하고 싶은지, 온라인골드몽 독일에서의 삶과 무대 이야기, 그 속에서 피어난 음악과 고향의 의미를 함께 들어봤습니다. 인터뷰는 그가 옥천에 머문 9월 11일, 그리고 독일로 돌아간 이후인 10월 26일 각각 대면과 비대면으로 진행됐습니다.
우연히 시작한 성악, 끈기로 만든 입시 1등
김진수씨는 자신을 "우연히 성악을 하게 된 사람"이라 소개한다. 어릴 적 꿈은 국어나 한문 교과의 교사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고교 진학 후 그에겐 뜻밖의 선택지가 하나 더 생긴다. '성악'이다.
"선생님을 할 정도의 성적은 아니어서요(웃음). 대학 진학의 다른 길을 찾던 중 음악을 만났죠."
8살 터울의 사촌누나(김윤주씨)가 그 길을 열어주었다. 고등학교 2학년 말, 피아노 전공이던 사촌누나의 권유로 그의 인생 방향이 바뀐 것이다.
"당시 사촌누나가 목원대 피아노과에 다니고 있었어요. 누나가 피아노를 치면 그 옆에서 노래 부르며 놀곤 했죠. 그러다 어느 날 '너도 노래를 해봐라'고 제안하면서 시작하게 됐어요."
성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고등학교 3학년. 그는 제1회 동양일보 음악경연대회, 청주대학교 전국학생음악경연대회에서 연달아 입상한다.
"그땐 그게 얼마나 큰 일인지도 몰랐어요. 그냥 주어진 곡을 열심히 부른 것뿐이었죠. 운이 좋았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그가 말하는 이 '운'에는 치열한 연습과 노력이 포함돼있다. 매일 밤 리듬과 박자, 음정을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배운 시간들 말이다. 사촌누나의 도움과 함께, 입시곡을 지도한 이충한 선생(현 안양시립합창단 상임지휘자)의 엄격한 지도가 더해졌다. "한 곡을 만 번이라도 부른다"는 각오로 연습에 매달렸다. 남들보다 늦게 시작한 만큼, "타고난 사람들을 따라가긴 어려운 만큼" 더 절실했다.
그가 입시곡으로 선택한 작품은 프란체스코 파울로 토스티의 '세그레토(Segreto, 비밀)'와 로베르트 슈만의 '두 비스트 비 아이네 블루메(Du bist wie eine Blume, 너는 한 송이 꽃과 같아)'였다.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곡은 아니었지만,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곡이라 느껴질 때까지 수없이 불렀다. 그렇게 곡의 정서가 몸에 스며들 만큼 연습한 끝에, 그는 단국대학교 성악과에 수석으로 입학한다. 11대1, 남학생 8명 모집에 88명이 지원했던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말이다.
"역시 운이 좋았다고 생각합니다(웃음). 타고난 재능보다는 끈기가 제 무기였죠. 성악은 자신에게 맞는 곡을 찾아, 그 곡 감정과 해석을 쌓아가는 일이에요. 그때 알았던 거 같아요. 노래는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나를 만드는 과정이라는 걸."
금구리의 기억
▲ 지난 9월 3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체임버홀에서 열린 연주회 때 모습(김진수씨 제공)
ⓒ 월간 옥이네
그의 어린 시절 기억 대부분은 옥천읍 금구리에 있다. 그의 부모님은 옥천종합상가의 신발가게 '제발 구두 좀 사가세요'를 운영하는 김영승·신회석씨. 정감 있고 재치 있는 상호 덕에 지금도 옥천 사람이라면 한 번은 들어봤을 가게다. 그는 이곳에서 2남 1녀(동생 김경수·김은애씨) 중 첫째로, 조용하고 책임감 강한 아이로 자랐다.
"지금 가게가 있는 그 자리에서 애기 때부터 살았어요. 뒤쪽에 단칸방이 하나 있었죠. 1987년 초까지 그곳에서 살았어요."
가게 문 여는 소리, 상품을 진열하는 부모님의 두런두런 말소리, 지나는 사람들의 담소... 지금 옥천종합상가 앞을 지날 때마다 만날 수 있는 장면이 그의 어린 시절 저편에도 낮은 멜로디처럼 남았을 테다.
삼양초, 옥천중, 옥천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책 읽기를 좋아하는 학생이었다. 국어와 한문 과목을 특히 좋아했고 문학과 시를 즐겼다. 친구들과 장난치기도 좋아했지만 늘 감정의 결이 섬세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섬세하다는 말을 자주 들었어요. 음악 가사에 담긴 정서를 읽어내는 데는 그런 제 성향이 도움이 됐던 거 같고요."
음악과 좀 더 가까워진 것은 중학교에 다닐 무렵이다. '샛별사진관(옥천읍)'을 운영하던 큰집에서 1년 정도 지내던 시기, 피아노를 전공하던 사촌누나의 영향을 받았다.
"하루 종일 피아노 소리를 들었어요. 가요, 클래식 가릴 것 없이요. 그때는 그냥 들리니까 들었던 거 같은데(웃음), 지금 돌아보면 그게 제 첫 음악 수업이었던 거 같습니다."
문학소년의 감수성, 음악이 되다
그는 노래를 단순한 발성 훈련이 아닌, 언어와 사유의 예술로 본다.
"음악은 그 시대의 문예사조를 반영합니다. 시와 철학을 알아야 작곡가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죠."
이런 깨달음은 하루아침에 얻어진 게 아니다. 수많은 좌절과 연습, 공부를 거듭하며 음악을 몸으로 배운 대학 시절이 주요했다.
대학 진학과 함께 본격적으로 뛰어든 음악의 세계. 그러나 서울로 올라가 처음 마주한 것은 '기초의 벽'이었다. 예고 출신 동기들은 자유롭게 음정을 읽고, 오페라나 합창 경험도 풍부했다. 어릴 적부터 갈고닦은 감각이 몸에 밴 친구들 사이에서, 그는 매 순간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했다.
"음정도 그렇고 박자도 그렇고 몸으로 타고나는 사람들이 있어요. 익히지 않아도 익혀지는 사람이요. 그런데 저는 그렇지 않거든요(웃음). 매번 피아노로 음정을 확인하고 박자도 더 신경써야 하고... 한 곡을 마주할 때마다 다시 '가나다'를 배우는 기분이었어요."
하지만 이 낯선 좌절 앞에서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그가 말한 '운',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과정은 바로 그 시기 치열한 노력 속에 있었다.
"무엇보다 기초 실력에서 큰 차이를 느꼈어요. 아무것도 모르던 제가 1등으로 입학해버려서, 사실 저도 이걸 기뻐해야 하나 헷갈리던 참이었거든요(웃음). 진짜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는 각종 연주회를 닥치는 대로 찾아다녔다. 아침 7시부터 저녁 9시까지, 연습실에서도 살다시피 했다. 그러면서 문학과 철학을 가까이하려 애썼다. "음악은 소리만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사람과 시대, 언어를 이해해야 노래가 깊어져요." 선언 같기도, 다짐 같기도 한 말이 그의 곁을 내내 맴돌았다.
'리트'에 빠진 청년의 다짐
▲ 가을, 카를스루에성 뒤의 공원에서 촬영한 사진(사진제공 : 김진수씨)
ⓒ 월간 옥이네
그 무렵 그는 독일 가곡 '리트(Lied)'에 빠져든다. 그에 따르면 리트는 "시와 음악이 완벽하게 결합된 예술가곡(시에 멜로디를 붙인 장르)"이다. 문학을 사랑하던 그에겐 너무나 매력적인 세계였다. 독일의 시인과 철학자들의 문장에 당대 최고의 작곡가들이 붙인 선율. 언어와 문학, 사유에 대한 애정을 지닌 그가 리트에 매료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슈베르트, 슈만의 가곡을 탐독하며 그 안의 언어와 감정을 파고들어갔다.
"성악이라고 하면 흔히 오페라를 떠올리지만 저는 리트에 더 끌렸어요. 그 시와 음악이 너무 좋아서, 더 알고 싶어졌죠. '나는 독일로 가야 돼' 이렇게 최면을 걸 정도로요."
그에게 리트는 점점 단순한 음악 장르가 아니게 됐다. '사유의 예술' 리트를 더 알고 싶었고 완전히 이해하고 싶었다. 그 시가 쓰여진 곳의 공기, 언어, 철학과 세계관을 직접 느끼지 않고서는 불가능하겠다는 생각까지 이르렀다. 그렇게 그는 독일 유학길에 올랐다. 1997년,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떠난, 낯설고 긴 여정이었다.
처음엔 언어의 장벽, 회색빛 하늘, 낯선 거리의 풍경이 그를 압도했다. 하지만 음악의 본질을 꿰뚫게 하는 수련의 시간이기도 했다.
"날씨도 흐리고, 말도 잘 통하지 않고, 늘 외로웠죠. 그런데 그 감정이 점점 생각을 깊게 만들더군요. 이방인으로서 느끼는 고독과 사무치는 향수... 그 모든 게 리트의 정서를 더 깊게 이해하게 해줬어요. 음악이 철학과 맞닿아 있다는 걸, 삶과 이토록 깊숙이 연결돼 있다는 걸 더욱 깊게 깨달았죠."
가장 외로웠던, 그러나 가장 중요한 배움의 시기. 그는 그렇게 독일에서 다시 음악을 만나게 된다.
음악의 스승이 된 이방의 고독
한 소절을 몇 시간, 하루 종일, 또는 몇날 며칠을 반복할 정도로 연습에 몰두했다. 음악적 성취에 좀 더 다가가고자 했던 그의 피나는 노력 중 하나였다. 그러나 독일 생활이 길어질수록 뚜렷해지는 벽을 피할 수 없었다.
"독일 가곡은 내가 잘할 수 있는 게 아니구나, 외국인으로서 완벽하게 해낼 수는 없구나 하는 걸 알게 됐죠. 이 나라 사람이 아닌 바에야, 이 언어를 모국어로 쓰지 않는 이상 그 세계에 깊이 들어간다는 게, 그게 얼마나 좁은 문인지 깨달은 거예요."
그 인식은 그를 한동안 깊은 우울로 몰아넣었다. 그러나 여전히, 그 시간은 배움의 시기였다. 그 이방성과 외로움이 오히려 예술이 됐다.
"그때도 음악, 책, 산책으로 버텼어요. 고독이 저를 자라게 했죠. 음악에 푹 빠져있다가, 비로소 다른 것들에 눈을 돌려보기도 하고요. 사진을 찍는다든지, 요리를 한다든지 하면서요."
음악이 전부였던 세계에서 한 발 비켜나, 자신을 이루는 다른 가능성을 바라보게 된 시간. 삶을 다른 감각으로 느끼는 법을 배운 때이기도 하다.
그는 석사, 박사 과정을 모두 밟으며 학문적으로도 성취를 쌓아갔다.
"독일에 간 지 두 달 만에 학교에 붙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일찍 되는 게 꼭 좋은 건 아니에요(웃음). 과정의 시간이 짧은만큼 준비도 짧은 거니까요."
그는 이를 두고도 "운이 좋았다"고 했다. 하지만 그 말 뒤에 얼마나 많은 노력이 있었는지 이제는 쉬이 가늠할 수 있겠다.
"입시를 여러 번 보는 게 돈도, 마음도 많이 드는 일이잖아요. 독일에 음악대학이 30여 곳 있는데, 저는 두 군데만 넣었거든요. 두 곳 모두 좋은 학교였는데, 다 합격했어요. 그냥 경험 삼아 넣었는데 그렇게 무사히 졸업하고, 또 곧바로 직장도 생기고... 돌이켜보면 모든 게 다 어떤 '시기'에 걸쳐 있었던 거 같아요."
그 시절은 그에게 성공보다 성찰로 남은 듯했다. 외로움과 자신감, 운과 노력이 교차하던 시간 속에서 그의 예술은 천천히 단단해졌다.
'아이게네', 나만의 소리를 찾고 싶다는 꿈
▲ 카를스루에 국립극장은 새로운 공연철이 시잘될 때마다 전 부서가 참여해 각자의 활동을 소개하고 설명하는 행사를 연다. 김진수씨가 소속된 합창단은 시민들에게 연습 과정을 공개해 한 편의 무대가 완성되기까지의 과정을 보여준다.
ⓒ 월간 옥이네
독일 카를스루에 국립극장, 학교 졸업 직후인 2001년부터 지금까지 그는 이곳에서 계속 성악가로 일하고 있다. 수백 명이 함께 만드는 대규모 오페라의 한 장면 속에서, 여전히 하루의 대부분을 연습과 점검으로 채운다.
"하루 세 시간 정도 노래하지만, 그 세 시간을 위해 하루를 다 쓰죠. 성악은 몸이 악기니까, 연습과 건강을 챙기는 일 모두 중요하고요."
무대를 위한 그의 하루는 단순하고 규칙적이다. 발성 점검, 호흡 연습, 가사 리듬 복기, 동선 리허설. 우리는 무대의 화려함을 먼저 보지만, 그에게 무대는 늘 책임의 자리다. 관객이 있는 한, 그들의 시간을 책임져야 하는 일. 그래서 매일 오전은 연습실에서 한 음, 한 호흡을 가다듬으며 보낸다. 건강 관리를 위해 비건(채식주의자)이 됐고 요즘은 달리기를 하며 일상의 리듬도 지켜간다.
오랜 기간 노래하며 그가 붙잡게 된 화두는 '아이게네(Eigene)' - 독일어로 '자신의 것', '고유한 것'이라는 의미 - 다. 그는 이 단어를 자신의 예술 철학처럼 여긴다.
"나만의 음악, 나만의 노래를 좀 더 잘 표현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나만 낼 수 있는 소리는 무엇일지 연구하고 찾아가는 게 중요하죠. 지금도 여전히 '언젠가 노래를 더 잘할 거야'하는 희망과 꿈이 있는데(웃음), 제 음악 인생의 목표예요."
한국에서 살았던 날보다 독일에서 살아온 날이 더 길어진 지금. 지난날은 그에게 단단한 커리어를 남겼지만 그는 여전히 '초심'을 곱씹는다. 가곡이든 오페라든, 결국 노래는 사람을 향해야 한다는 생각. 모든 예술은 사람의 마음에 가닿을 때 비로소 진짜 예술이 된다는 믿음을 말이다.
카를스루에에서 떠올리는 옥천
그는 옥천을 자주 떠올린다. 독일에서의 일상이 익숙해졌어도 고향의 공기와 사람, 공간에 대한 그리움은 여전하다.
"옥천은 제가 음악을 처음 알게 된 곳이니까요. 사랑하는 가족, 친구, 추억이 있는 곳이기도 하고요. 다만 옥천의 일상이 예술이나 문화와는 조금 멀게 느껴질 때가 있어 아쉽습니다. 정지용, 정순철 같은 좋은 인물 자원을 갖고 있지만 그것이 생활 속에 있다는 느낌은 잘 받지 못해요. 마치 클래식이나 공연예술을 '특별한 날에만 보는 것'으로 여기는 것처럼요."
그는 옥천문화예술회관을 '클래식 공연에 아주 훌륭한 곳'이라 말한다. 지난 2013년 3월 직접 이 무대에 올라 독일과 한국의 가곡 22곡을 불렀던 그이다.
거기 그랜드피아노가 '스타인웨이'라고 아주 좋은 제품인데(웃음), 시설 전반이 훌륭한 곳이에요. 그곳에서 청소년이나 주민들이 조금 더 자연스럽게 클래식을 접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음악이 어렵지 않다는 걸 느낄 수 있도록요."
국에 올 때마다 늘 공연을 여는 것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이번 한국 방문 때도 서울에서 공연을 치르고 돌아갔다. 큰 무대, 많은 관객 앞에 자주 서지만 노래를 들어주는 사람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설 수 있다는 마음가짐이다.
"큰 공연장도 좋지만, 관객과 숨소리가 닿는 거리의 작은 무대가 더 좋아요. 예술이 일상 가까이 있을 때 사람들의 마음이 열리고 대화가 시작되잖아요. 예술이 해야 하는 일인 거죠."
둠벙에서 공연하고 싶다고 했던 말도 그 맥락에서 나왔다. 그에게 둠벙 같은 작은 공간은 '예술이 원래 있어야 할, 사람들 옆의 자리'를 상징한다.
그가 소속된 독일 카를스루에 극장은 시기별로 대규모 오페라 공연을 무대에 올리는데, 이때는 상임 오케스트라와 전속 성악단 외에도 '시민합창단(Extrachor, 엑스트라코어)'이 함께 한다. 주부부터 의사, 교사, 학생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진 시민들이 저녁마다 모여 프로 합창단과 함께 연습을 한다.
"이런 큰 공연은 시민합창단이 없으면 진행이 안 돼요. 그분들의 참여로 무대가 완성되고, 그 과정 자체가 지역문화예술의 기반이 되죠."
특히 크리스마스, 연말이 다가오는 요즘은 시민합창단의 역할이 더욱 중요하다. 자코모 푸치니의 '라보엠(La Bohème)', 리하르트 바그너 '로엔그린(Lohengrin)' 같은 대작이 상연 준비 중이다. 한 작품에 합창단만 100명, 오케스트라까지 합하면 200명이 넘게 서는 무대. 그는 11월 16일 막이 오르는 3막짜리 오페라 '로엔그린' 무대에 함께 선다. 장장 4시간 40분짜리 공연이다.
그가 설명한 독일의 극장 시스템은 '예술이 지역을 품는 방식의 전형'으로 보이기도 했다. 극장이 하나의 지역 문화 생태계로 작동하고, 지역 주민이 예술의 주체로 참여하는 구조. 누구나 예술을 향유하고 그 일부가 될 수 있는 사회. 그가 옥천에 바라는 것도 바로 이런 풍경이다. 기쁨과 슬픔, 행복과 외로움을 나누는 언어로서의 클래식이 지역의 일상 가까이 머물렀으면 한다는, 여전히 고향을 그리워하는 한 예술가의 바람이다.
고향에 두는 약속 그리고 꿈
▲ 카를스루에 국립극장 공연 모습(사진제공 : 김진수씨)
ⓒ 월간 옥이네
"그럴 기회가 있을지 모르지만, 그동안 공부하고 경험한 것을 고향 사람들과 나눌 수 있다면 좋겠어요. 그게 공연이든, 시민합창단 조직이든, 작더라도 옥천 안에서 좋은 바람이 되는 일을 해보고 싶습니다."
"언젠가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그의 바람 뒤엔 더 큰 꿈이 있다. 그는 이미 구체적인 제안도 건넸다. 정지용의 시에 곡을 붙인 가곡 공모전이나, 작곡가 정순철의 작품을 활용한 클래식 공연 등 옥천이 가진 문화 자산을 예술로 확장하는 아이디어들이다. 시가 음악이 되고 동요가 클래식을 만날 때 피어날 활기. 그걸 지역에서 함께 만들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질까.
인터뷰 말미, 그와 작은 약속을 하나 나눴다. 내년 혹은 그 이후라도 언젠가 옥천에서, 독일의 일상 속 문화와 예술을 소개하고 노래하는 자리를 기획해보자고. 음악이 선택받은 사람들만의 것이 아닌 우리 모두의 것임을 보여주는 자리를 열어보자고.
오늘도 그의 목소리는 독일의 대극장을 가득 채울 테다. 그러나 그 울림의 근원은 언제나 옥천의 골목과 사람들 속에 있다. 이방의 고독을 예술로 바꿔낸 성악가 김진수. 그가 꿈꾸는 다음 무대는 다시, 고향의 작은 공간이다.
월간옥이네 통권 101호(2025년 11월호)글·사진 박누리, 사진제공 김진수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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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악가 김진수씨
ⓒ 월간 옥이네
언젠가 충북 옥천 지역문화창작공간 '둠벙'에서 지역 중학생을 대상으로 클래식 공연이 열린 적이 있습니 사이다릴게임 다. 만화책·그림책이 빽빽한 서가 앞에서 첼로와 바이올린, 건반 선율에 손뼉을 치며 호응했던 날이지요. 그 장면이 무척 흐뭇했던 터라, 그대로 촬영해 SNS 계정에 올린 적이 있는데요. 그 직후 한 사람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저도 둠벙에서 꼭 노래하고 싶습니다. 한국에 가면 같이 공연을 기획해봐요."
릴게임사이트추천 그의 이름은 김진수. 옥천 출신으로, 현재 독일 카를스루에 극장에서 테너로 활동하고 있는 성악가입니다. 이미 수백 명의 오케스트라·합창단과 함께 큰 무대에 서는 그가 노래하고 싶다는 곳은 옥천의 작은 문화공간. 내심 반가웠지만, 공간 규모를 잘 모르는 그가 덜컥 제안한 것은 아닐까 잠시 망설였습니다. "이곳은 전문 공연장이 아니고, 공간도 크지 않 알라딘릴게임 다"는 노파심 섞인 설명에 웃음 섞인 대답이 돌아왔죠. "그래서 더 그곳에서 노래하고 싶어요."
클래식을 어렵게 만드는 건 공간의 격식이 아니라 마음의 거리라고 했던가요. 일상의 기쁨과 슬픔, 삶을 품은 음악이 사람들 곁에서 자연스럽게 피어나길 바란다는 그의 말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습니다.
지난해 여름, 그를 초청한 공 바다이야기예시 연을 둠벙에서 열어보려 했지만 여러 사정으로 무산되고 말았는데요. 올해 여름 휴가로 고향을 찾은 김진수씨를 오랜만에 다시 만났습니다. 그는 1년에 한 번 주어지는 긴 휴가를 모두 고향 방문에 쏟습니다. "옥천에서 자란 저는, 여전히 옥천을 그리워합니다."
그가 어떻게 성악가의 길을 걷게 됐는지, 그리고 왜 여전히 옥천에서 노래하고 싶은지, 온라인골드몽 독일에서의 삶과 무대 이야기, 그 속에서 피어난 음악과 고향의 의미를 함께 들어봤습니다. 인터뷰는 그가 옥천에 머문 9월 11일, 그리고 독일로 돌아간 이후인 10월 26일 각각 대면과 비대면으로 진행됐습니다.
우연히 시작한 성악, 끈기로 만든 입시 1등
김진수씨는 자신을 "우연히 성악을 하게 된 사람"이라 소개한다. 어릴 적 꿈은 국어나 한문 교과의 교사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고교 진학 후 그에겐 뜻밖의 선택지가 하나 더 생긴다. '성악'이다.
"선생님을 할 정도의 성적은 아니어서요(웃음). 대학 진학의 다른 길을 찾던 중 음악을 만났죠."
8살 터울의 사촌누나(김윤주씨)가 그 길을 열어주었다. 고등학교 2학년 말, 피아노 전공이던 사촌누나의 권유로 그의 인생 방향이 바뀐 것이다.
"당시 사촌누나가 목원대 피아노과에 다니고 있었어요. 누나가 피아노를 치면 그 옆에서 노래 부르며 놀곤 했죠. 그러다 어느 날 '너도 노래를 해봐라'고 제안하면서 시작하게 됐어요."
성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고등학교 3학년. 그는 제1회 동양일보 음악경연대회, 청주대학교 전국학생음악경연대회에서 연달아 입상한다.
"그땐 그게 얼마나 큰 일인지도 몰랐어요. 그냥 주어진 곡을 열심히 부른 것뿐이었죠. 운이 좋았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그가 말하는 이 '운'에는 치열한 연습과 노력이 포함돼있다. 매일 밤 리듬과 박자, 음정을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배운 시간들 말이다. 사촌누나의 도움과 함께, 입시곡을 지도한 이충한 선생(현 안양시립합창단 상임지휘자)의 엄격한 지도가 더해졌다. "한 곡을 만 번이라도 부른다"는 각오로 연습에 매달렸다. 남들보다 늦게 시작한 만큼, "타고난 사람들을 따라가긴 어려운 만큼" 더 절실했다.
그가 입시곡으로 선택한 작품은 프란체스코 파울로 토스티의 '세그레토(Segreto, 비밀)'와 로베르트 슈만의 '두 비스트 비 아이네 블루메(Du bist wie eine Blume, 너는 한 송이 꽃과 같아)'였다.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곡은 아니었지만,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곡이라 느껴질 때까지 수없이 불렀다. 그렇게 곡의 정서가 몸에 스며들 만큼 연습한 끝에, 그는 단국대학교 성악과에 수석으로 입학한다. 11대1, 남학생 8명 모집에 88명이 지원했던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말이다.
"역시 운이 좋았다고 생각합니다(웃음). 타고난 재능보다는 끈기가 제 무기였죠. 성악은 자신에게 맞는 곡을 찾아, 그 곡 감정과 해석을 쌓아가는 일이에요. 그때 알았던 거 같아요. 노래는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나를 만드는 과정이라는 걸."
금구리의 기억
▲ 지난 9월 3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체임버홀에서 열린 연주회 때 모습(김진수씨 제공)
ⓒ 월간 옥이네
그의 어린 시절 기억 대부분은 옥천읍 금구리에 있다. 그의 부모님은 옥천종합상가의 신발가게 '제발 구두 좀 사가세요'를 운영하는 김영승·신회석씨. 정감 있고 재치 있는 상호 덕에 지금도 옥천 사람이라면 한 번은 들어봤을 가게다. 그는 이곳에서 2남 1녀(동생 김경수·김은애씨) 중 첫째로, 조용하고 책임감 강한 아이로 자랐다.
"지금 가게가 있는 그 자리에서 애기 때부터 살았어요. 뒤쪽에 단칸방이 하나 있었죠. 1987년 초까지 그곳에서 살았어요."
가게 문 여는 소리, 상품을 진열하는 부모님의 두런두런 말소리, 지나는 사람들의 담소... 지금 옥천종합상가 앞을 지날 때마다 만날 수 있는 장면이 그의 어린 시절 저편에도 낮은 멜로디처럼 남았을 테다.
삼양초, 옥천중, 옥천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책 읽기를 좋아하는 학생이었다. 국어와 한문 과목을 특히 좋아했고 문학과 시를 즐겼다. 친구들과 장난치기도 좋아했지만 늘 감정의 결이 섬세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섬세하다는 말을 자주 들었어요. 음악 가사에 담긴 정서를 읽어내는 데는 그런 제 성향이 도움이 됐던 거 같고요."
음악과 좀 더 가까워진 것은 중학교에 다닐 무렵이다. '샛별사진관(옥천읍)'을 운영하던 큰집에서 1년 정도 지내던 시기, 피아노를 전공하던 사촌누나의 영향을 받았다.
"하루 종일 피아노 소리를 들었어요. 가요, 클래식 가릴 것 없이요. 그때는 그냥 들리니까 들었던 거 같은데(웃음), 지금 돌아보면 그게 제 첫 음악 수업이었던 거 같습니다."
문학소년의 감수성, 음악이 되다
그는 노래를 단순한 발성 훈련이 아닌, 언어와 사유의 예술로 본다.
"음악은 그 시대의 문예사조를 반영합니다. 시와 철학을 알아야 작곡가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죠."
이런 깨달음은 하루아침에 얻어진 게 아니다. 수많은 좌절과 연습, 공부를 거듭하며 음악을 몸으로 배운 대학 시절이 주요했다.
대학 진학과 함께 본격적으로 뛰어든 음악의 세계. 그러나 서울로 올라가 처음 마주한 것은 '기초의 벽'이었다. 예고 출신 동기들은 자유롭게 음정을 읽고, 오페라나 합창 경험도 풍부했다. 어릴 적부터 갈고닦은 감각이 몸에 밴 친구들 사이에서, 그는 매 순간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했다.
"음정도 그렇고 박자도 그렇고 몸으로 타고나는 사람들이 있어요. 익히지 않아도 익혀지는 사람이요. 그런데 저는 그렇지 않거든요(웃음). 매번 피아노로 음정을 확인하고 박자도 더 신경써야 하고... 한 곡을 마주할 때마다 다시 '가나다'를 배우는 기분이었어요."
하지만 이 낯선 좌절 앞에서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그가 말한 '운',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과정은 바로 그 시기 치열한 노력 속에 있었다.
"무엇보다 기초 실력에서 큰 차이를 느꼈어요. 아무것도 모르던 제가 1등으로 입학해버려서, 사실 저도 이걸 기뻐해야 하나 헷갈리던 참이었거든요(웃음). 진짜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는 각종 연주회를 닥치는 대로 찾아다녔다. 아침 7시부터 저녁 9시까지, 연습실에서도 살다시피 했다. 그러면서 문학과 철학을 가까이하려 애썼다. "음악은 소리만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사람과 시대, 언어를 이해해야 노래가 깊어져요." 선언 같기도, 다짐 같기도 한 말이 그의 곁을 내내 맴돌았다.
'리트'에 빠진 청년의 다짐
▲ 가을, 카를스루에성 뒤의 공원에서 촬영한 사진(사진제공 : 김진수씨)
ⓒ 월간 옥이네
그 무렵 그는 독일 가곡 '리트(Lied)'에 빠져든다. 그에 따르면 리트는 "시와 음악이 완벽하게 결합된 예술가곡(시에 멜로디를 붙인 장르)"이다. 문학을 사랑하던 그에겐 너무나 매력적인 세계였다. 독일의 시인과 철학자들의 문장에 당대 최고의 작곡가들이 붙인 선율. 언어와 문학, 사유에 대한 애정을 지닌 그가 리트에 매료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슈베르트, 슈만의 가곡을 탐독하며 그 안의 언어와 감정을 파고들어갔다.
"성악이라고 하면 흔히 오페라를 떠올리지만 저는 리트에 더 끌렸어요. 그 시와 음악이 너무 좋아서, 더 알고 싶어졌죠. '나는 독일로 가야 돼' 이렇게 최면을 걸 정도로요."
그에게 리트는 점점 단순한 음악 장르가 아니게 됐다. '사유의 예술' 리트를 더 알고 싶었고 완전히 이해하고 싶었다. 그 시가 쓰여진 곳의 공기, 언어, 철학과 세계관을 직접 느끼지 않고서는 불가능하겠다는 생각까지 이르렀다. 그렇게 그는 독일 유학길에 올랐다. 1997년,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떠난, 낯설고 긴 여정이었다.
처음엔 언어의 장벽, 회색빛 하늘, 낯선 거리의 풍경이 그를 압도했다. 하지만 음악의 본질을 꿰뚫게 하는 수련의 시간이기도 했다.
"날씨도 흐리고, 말도 잘 통하지 않고, 늘 외로웠죠. 그런데 그 감정이 점점 생각을 깊게 만들더군요. 이방인으로서 느끼는 고독과 사무치는 향수... 그 모든 게 리트의 정서를 더 깊게 이해하게 해줬어요. 음악이 철학과 맞닿아 있다는 걸, 삶과 이토록 깊숙이 연결돼 있다는 걸 더욱 깊게 깨달았죠."
가장 외로웠던, 그러나 가장 중요한 배움의 시기. 그는 그렇게 독일에서 다시 음악을 만나게 된다.
음악의 스승이 된 이방의 고독
한 소절을 몇 시간, 하루 종일, 또는 몇날 며칠을 반복할 정도로 연습에 몰두했다. 음악적 성취에 좀 더 다가가고자 했던 그의 피나는 노력 중 하나였다. 그러나 독일 생활이 길어질수록 뚜렷해지는 벽을 피할 수 없었다.
"독일 가곡은 내가 잘할 수 있는 게 아니구나, 외국인으로서 완벽하게 해낼 수는 없구나 하는 걸 알게 됐죠. 이 나라 사람이 아닌 바에야, 이 언어를 모국어로 쓰지 않는 이상 그 세계에 깊이 들어간다는 게, 그게 얼마나 좁은 문인지 깨달은 거예요."
그 인식은 그를 한동안 깊은 우울로 몰아넣었다. 그러나 여전히, 그 시간은 배움의 시기였다. 그 이방성과 외로움이 오히려 예술이 됐다.
"그때도 음악, 책, 산책으로 버텼어요. 고독이 저를 자라게 했죠. 음악에 푹 빠져있다가, 비로소 다른 것들에 눈을 돌려보기도 하고요. 사진을 찍는다든지, 요리를 한다든지 하면서요."
음악이 전부였던 세계에서 한 발 비켜나, 자신을 이루는 다른 가능성을 바라보게 된 시간. 삶을 다른 감각으로 느끼는 법을 배운 때이기도 하다.
그는 석사, 박사 과정을 모두 밟으며 학문적으로도 성취를 쌓아갔다.
"독일에 간 지 두 달 만에 학교에 붙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일찍 되는 게 꼭 좋은 건 아니에요(웃음). 과정의 시간이 짧은만큼 준비도 짧은 거니까요."
그는 이를 두고도 "운이 좋았다"고 했다. 하지만 그 말 뒤에 얼마나 많은 노력이 있었는지 이제는 쉬이 가늠할 수 있겠다.
"입시를 여러 번 보는 게 돈도, 마음도 많이 드는 일이잖아요. 독일에 음악대학이 30여 곳 있는데, 저는 두 군데만 넣었거든요. 두 곳 모두 좋은 학교였는데, 다 합격했어요. 그냥 경험 삼아 넣었는데 그렇게 무사히 졸업하고, 또 곧바로 직장도 생기고... 돌이켜보면 모든 게 다 어떤 '시기'에 걸쳐 있었던 거 같아요."
그 시절은 그에게 성공보다 성찰로 남은 듯했다. 외로움과 자신감, 운과 노력이 교차하던 시간 속에서 그의 예술은 천천히 단단해졌다.
'아이게네', 나만의 소리를 찾고 싶다는 꿈
▲ 카를스루에 국립극장은 새로운 공연철이 시잘될 때마다 전 부서가 참여해 각자의 활동을 소개하고 설명하는 행사를 연다. 김진수씨가 소속된 합창단은 시민들에게 연습 과정을 공개해 한 편의 무대가 완성되기까지의 과정을 보여준다.
ⓒ 월간 옥이네
독일 카를스루에 국립극장, 학교 졸업 직후인 2001년부터 지금까지 그는 이곳에서 계속 성악가로 일하고 있다. 수백 명이 함께 만드는 대규모 오페라의 한 장면 속에서, 여전히 하루의 대부분을 연습과 점검으로 채운다.
"하루 세 시간 정도 노래하지만, 그 세 시간을 위해 하루를 다 쓰죠. 성악은 몸이 악기니까, 연습과 건강을 챙기는 일 모두 중요하고요."
무대를 위한 그의 하루는 단순하고 규칙적이다. 발성 점검, 호흡 연습, 가사 리듬 복기, 동선 리허설. 우리는 무대의 화려함을 먼저 보지만, 그에게 무대는 늘 책임의 자리다. 관객이 있는 한, 그들의 시간을 책임져야 하는 일. 그래서 매일 오전은 연습실에서 한 음, 한 호흡을 가다듬으며 보낸다. 건강 관리를 위해 비건(채식주의자)이 됐고 요즘은 달리기를 하며 일상의 리듬도 지켜간다.
오랜 기간 노래하며 그가 붙잡게 된 화두는 '아이게네(Eigene)' - 독일어로 '자신의 것', '고유한 것'이라는 의미 - 다. 그는 이 단어를 자신의 예술 철학처럼 여긴다.
"나만의 음악, 나만의 노래를 좀 더 잘 표현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나만 낼 수 있는 소리는 무엇일지 연구하고 찾아가는 게 중요하죠. 지금도 여전히 '언젠가 노래를 더 잘할 거야'하는 희망과 꿈이 있는데(웃음), 제 음악 인생의 목표예요."
한국에서 살았던 날보다 독일에서 살아온 날이 더 길어진 지금. 지난날은 그에게 단단한 커리어를 남겼지만 그는 여전히 '초심'을 곱씹는다. 가곡이든 오페라든, 결국 노래는 사람을 향해야 한다는 생각. 모든 예술은 사람의 마음에 가닿을 때 비로소 진짜 예술이 된다는 믿음을 말이다.
카를스루에에서 떠올리는 옥천
그는 옥천을 자주 떠올린다. 독일에서의 일상이 익숙해졌어도 고향의 공기와 사람, 공간에 대한 그리움은 여전하다.
"옥천은 제가 음악을 처음 알게 된 곳이니까요. 사랑하는 가족, 친구, 추억이 있는 곳이기도 하고요. 다만 옥천의 일상이 예술이나 문화와는 조금 멀게 느껴질 때가 있어 아쉽습니다. 정지용, 정순철 같은 좋은 인물 자원을 갖고 있지만 그것이 생활 속에 있다는 느낌은 잘 받지 못해요. 마치 클래식이나 공연예술을 '특별한 날에만 보는 것'으로 여기는 것처럼요."
그는 옥천문화예술회관을 '클래식 공연에 아주 훌륭한 곳'이라 말한다. 지난 2013년 3월 직접 이 무대에 올라 독일과 한국의 가곡 22곡을 불렀던 그이다.
거기 그랜드피아노가 '스타인웨이'라고 아주 좋은 제품인데(웃음), 시설 전반이 훌륭한 곳이에요. 그곳에서 청소년이나 주민들이 조금 더 자연스럽게 클래식을 접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음악이 어렵지 않다는 걸 느낄 수 있도록요."
국에 올 때마다 늘 공연을 여는 것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이번 한국 방문 때도 서울에서 공연을 치르고 돌아갔다. 큰 무대, 많은 관객 앞에 자주 서지만 노래를 들어주는 사람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설 수 있다는 마음가짐이다.
"큰 공연장도 좋지만, 관객과 숨소리가 닿는 거리의 작은 무대가 더 좋아요. 예술이 일상 가까이 있을 때 사람들의 마음이 열리고 대화가 시작되잖아요. 예술이 해야 하는 일인 거죠."
둠벙에서 공연하고 싶다고 했던 말도 그 맥락에서 나왔다. 그에게 둠벙 같은 작은 공간은 '예술이 원래 있어야 할, 사람들 옆의 자리'를 상징한다.
그가 소속된 독일 카를스루에 극장은 시기별로 대규모 오페라 공연을 무대에 올리는데, 이때는 상임 오케스트라와 전속 성악단 외에도 '시민합창단(Extrachor, 엑스트라코어)'이 함께 한다. 주부부터 의사, 교사, 학생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진 시민들이 저녁마다 모여 프로 합창단과 함께 연습을 한다.
"이런 큰 공연은 시민합창단이 없으면 진행이 안 돼요. 그분들의 참여로 무대가 완성되고, 그 과정 자체가 지역문화예술의 기반이 되죠."
특히 크리스마스, 연말이 다가오는 요즘은 시민합창단의 역할이 더욱 중요하다. 자코모 푸치니의 '라보엠(La Bohème)', 리하르트 바그너 '로엔그린(Lohengrin)' 같은 대작이 상연 준비 중이다. 한 작품에 합창단만 100명, 오케스트라까지 합하면 200명이 넘게 서는 무대. 그는 11월 16일 막이 오르는 3막짜리 오페라 '로엔그린' 무대에 함께 선다. 장장 4시간 40분짜리 공연이다.
그가 설명한 독일의 극장 시스템은 '예술이 지역을 품는 방식의 전형'으로 보이기도 했다. 극장이 하나의 지역 문화 생태계로 작동하고, 지역 주민이 예술의 주체로 참여하는 구조. 누구나 예술을 향유하고 그 일부가 될 수 있는 사회. 그가 옥천에 바라는 것도 바로 이런 풍경이다. 기쁨과 슬픔, 행복과 외로움을 나누는 언어로서의 클래식이 지역의 일상 가까이 머물렀으면 한다는, 여전히 고향을 그리워하는 한 예술가의 바람이다.
고향에 두는 약속 그리고 꿈
▲ 카를스루에 국립극장 공연 모습(사진제공 : 김진수씨)
ⓒ 월간 옥이네
"그럴 기회가 있을지 모르지만, 그동안 공부하고 경험한 것을 고향 사람들과 나눌 수 있다면 좋겠어요. 그게 공연이든, 시민합창단 조직이든, 작더라도 옥천 안에서 좋은 바람이 되는 일을 해보고 싶습니다."
"언젠가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그의 바람 뒤엔 더 큰 꿈이 있다. 그는 이미 구체적인 제안도 건넸다. 정지용의 시에 곡을 붙인 가곡 공모전이나, 작곡가 정순철의 작품을 활용한 클래식 공연 등 옥천이 가진 문화 자산을 예술로 확장하는 아이디어들이다. 시가 음악이 되고 동요가 클래식을 만날 때 피어날 활기. 그걸 지역에서 함께 만들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질까.
인터뷰 말미, 그와 작은 약속을 하나 나눴다. 내년 혹은 그 이후라도 언젠가 옥천에서, 독일의 일상 속 문화와 예술을 소개하고 노래하는 자리를 기획해보자고. 음악이 선택받은 사람들만의 것이 아닌 우리 모두의 것임을 보여주는 자리를 열어보자고.
오늘도 그의 목소리는 독일의 대극장을 가득 채울 테다. 그러나 그 울림의 근원은 언제나 옥천의 골목과 사람들 속에 있다. 이방의 고독을 예술로 바꿔낸 성악가 김진수. 그가 꿈꾸는 다음 무대는 다시, 고향의 작은 공간이다.
월간옥이네 통권 101호(2025년 11월호)글·사진 박누리, 사진제공 김진수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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